여기 한 권의 단단하고 묵직한 잡지가 있다. 잡지에 글을 쓴 이름들만 봐도 잡지의 무게감을 느낄 수가 있다. 사뮈엘 베케트(사무엘 베케트, Samuel Barclay Beckett), 호르헤 보르헤스(Borges, Jorge Luis), 윌리엄 버로스(William Seward Burroughs), 장 주네(Jean Genet), 앨런 긴즈버그(Allen Ginsberg), 파블로 네루다(Pablo Neruda), 잭 케루악(Jack Kerouac), 귄터 그라스(Gunter Wilhelm Grass), 오에 겐자부로 등. 동양과 서양, 미국과 유럽 대륙의 내로라하는 지성들이 한 곳에 모였다. 바로 미국의 문학잡지 <에버그린(Evergreen)>에서. 1957년에 창간된 이 잡지는 좌파 성향의 문학지였으며, 외설적이고 문란하다는 이유로 곧잘 법적 공방에 휘말리기도 했다. 잡지의 창간자인 바니 로세트(Barney Rosset)는 그로브(Grove)라는 아주 작은 출판사의 설립자였다. 하지만 그의 문화에 대한 식견은 남달라 헨리 밀러의 [북회귀선], 윌리엄 버로스의 [벌거벗은 점심] 등을 출간하며 외설에 관한 논쟁을 촉발시켰고, 사뮈엘 베케트의 [고도를 기다리며] 등을 미국에서 처음 출판했다. 잡지가 나올 당시 서구 사회에서 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곧 정치를 말하는 것이었다. 성적 억압은 곧 정치·사회적인 문제였기 때문이다. 잡지 <에버그린>은 성과 에로스를 소재로 하였지만 그것은 당시 정치에 대한 하나의 은유로서 작용했고, 로세트는 당시 사회 금기에 대해 문학으로 도전장을 내밀었던 인물이다. 동시대 또 하나의 좌파 잡지인 <람파츠(Ramparts)>와 함께 미국을 대표하는 지성지로서 각광받았던 <에버그린>은 1967년부터 디자이너로 켄 디어도프(Ken Deardoff)를 영입한다. 켄 디어도프 영입 뒤 일러스트레이션과 사진을 더 적극적으로 도입하게 되었고, 이 과정에서 미국의 대표적인 일러스트레이터인 브래드 홀랜드(Brad Holland)와 미국 사진사를 새롭게 쓴 로버트 프랭크(Robert Frank)의 작품들이 수록되기도 했다. 잡지의 디자인은 진보적인 내용과는 달리 오히려 고전적이고 차분했다. <에버그린>은 디자인이 내용을 제압해버리는 잡지가 되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. 1998년 <에버그린>은 로세트와 그의 부인에 의해 다시 부활한다. 그리고 그 모습은 www.evergreenreview.com에서 만나볼 수 있다. |